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 (문단 편집) === [[프랑스 혁명 전쟁]] === 1792년 4월 프랑스 혁명 전쟁이 발발하자 군 사령관으로 복귀했다. 프랑스군은 약체화한 상태였기 때문에 연전연패 했다. 6월 20일, 일단의 군중들이 튈르리 궁에 난입해 루이 16세에게 법의 통과를 청원하는 일이 있자, 자신의 군대를 버려두고 부관만 거느린 채 무단탈영[* 지휘관이 이탈할 경우 전쟁대신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하여 파리로 와서 왕의 안전보장과 청원자들의 엄벌을 요구했다. 이는 군 사령관이 문민정부를 협박한 것으로 여겨져, 갈수록 실추하는 지지에도 남아있던 라파예트의 지지자들마저 돌아서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왕정을 지지했던 보수파와 전시의 군부숙청이 위험함을 고려한 중도파 덕에 간신히 탈영죄로 기소되지는 않았으나, 이 사태로 라파예트는 완벽하게 왕정 최후의 보루, 왕의 충견이자 혁명의 적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1792년 8월 10일 봉기]]로 왕권이 정지되고 공화국이 선포, 푀양파 의원들이 왕당파라는 이유로 차례차례 체포되어 [[단두대]]로 끌려가자 라파예트는 사령관에서 해임되었다. [[왕당파]]로 간주되어 신변의 위협을 느낀 라파예트와 그의 휘하에서 종군했던 일부 장교들은 당시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던 벨기에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려고 탈출했으나 도중 오스트리아 군대에 체포되어, [[포로]]로서 5년 간 옥중 생활을 보낸 다음[* 그의 포로생활은 가혹한 면이 많았다. 혁명 전부터 가졌던 그의 귀족작위와 고위 군 경력과 계급은 인정되지 않았으며 그를 각각 감옥에 보냈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그를 핵심 혁명분자로 간주하여 대우를 장기간 독방 감금과 팔과 다리에 족쇄를 채우는 식(감금 초기)으로 대했다. 처음엔 프로이센이 그를 억류했지만 1795년 바젤 조약으로 적대관계가 해제되었는데 이때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그를 풀어주진 않고 오스트리아에게 인계했다. 1795년 그의 아내가 프란츠 2세에게 간청하여 그녀와 두 딸이 자진해서 감옥으로 들어와 라파예트와 같이 생활했다.] 1799년 귀국했으나 시대는 이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정권을 잡은 상태였고, 흘러간 인물로 전락한 라파예트가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나폴레옹은 그간의 명성을 고려해서 라파예트를 복권시키는 데 좀 도움을 주긴 했지만[* 1797년 캄포 포르미오 조약의 내용 중 라파예트 일가 및 같이 억류중였던 일부 고위 장교들의 석방이 포함되어있었다. 다만 라파예트는 여전히 불안정했던 프랑스 국내로 귀국하지 않고 네덜란드에서 2년 동안 지내다 나폴레옹이 집권한 직후 귀국했다.] 야심찬 젊은 장군과 라파예트와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고 라파예트는 나폴레옹 정부에 참여를 거부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은퇴 생활을 보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